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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QUES

6회 개인전

'그대로 멈춰라' 

2009. 11.25-12.01  서울 갤러리 갈라2009.12.03-12.13  수원미술전시관

그대로 멈춰라!

- 푸른 피로 새긴 이윤기의 목리별곡 

 

 그가 짧은 편지를 보내왔다.

   아름답지만, 아름답지만은 않은 풍경에 서있습니다.

   차갑지만, 차갑지만은 않은 붓을 듭니다.

   목리를 살았던 존재들과 마주선 채 그대로 멈춥니다.

   그 풍경이 비로소 마음에 듭니다.

편지를 풀어 쓰면서 나는 고려의 청산별곡을 떠 올렸다. 그의 글에는 다시 유랑을 떠나야 화가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는 이번 전시 주제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한 바 있다. “그대로 멈춰라!” 그 외침에는 ‘휴먼시아’나 ‘명품도시’, 심지어는 ‘에코토피아’ 따위로 가장한 자본 판타지의 성채인 동탄 신도시와 국토 난개발에 대한 작가의 분노가 서려있었다. 2009년 겨울이 지나면 그가 깃들어 있는 목리창작촌은 신도시 밑창으로 가라앉게 될 것이다. 물밑 수몰지구보다 신도시 밑창이 더 비참한 것은 마을의 역사를 공유한 기억공간들이 흔적하나 남기지 못한 채 깡그리 붕괴된다는 점이다. 이윤기의 작품은 목리라는 회화적 공간을 살았던 무형의 혹은 유형의 생명들로 직조한 ‘존재의 풍경’이다. 거기에는 붕괴의 속도조차 침범하지 못하는 ‘멈춤’의 미학이 둥글게 돌담을 이루고 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靑山)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ᄃᆞ래랑 먹고

청산(靑山)애 살어리랏다.

 

이 시에는 뜨거운 소망이 있다. 고려 유민들의 노래인지 아닌지에 대해선 판관(역사가)의 몫이겠지만, 시 전체를 통어하는 시적 화자는 더 이상 떠돌지 않고 ‘청산’에 살기를 바라는 간곡한 마음을 이 시에 담고 있다. 그때의 ‘청산’이 삶으로부터 유리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공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누군들 머래와 다래만 먹고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시가 “민란(民亂)에 참여한 농민·어민·서리(胥吏)·노예·광대”들의 노래일 수 있다는 문학적 추론이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처없이 떠돌아야 하는 것은 가난한 민중이요, 광대들이기 때문이다. 2001년에 목판화가, 조각가 몇이 목리로 흘러 들어와 컨테이너 작업실을 연지 불과 8년, 이제 그들은 다시 쫓겨야 한다. 목리는 지도에서조차 사라질 것이다.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 있는 청산조차 없는 이 비루한 현실에서 예술가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하는가!

 

목리의 완전한 파괴와 현실적 부재는 목리를 살았던 예술가들에게 큰 상처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목리는 그들에게 예술을 잉태하는 모궁(母宮)이었기 때문이다. 수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가들이 가장 끝자리에서 발굴한 목리는 향촌도 아니요 그렇다고 시골마을이라 하기에도 어정쩡한, 공장과 전원주택 몇 채 그리고 가난한 지붕들이 뒤섞여 있는 쇠락한 마을이었다. 작가들은 그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둥지를 틀었다. 작업실로 쓰일 창고나 축사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빈터에 컨테이너를 이어 붙이거나 대형 하우스를 세운 게 고작이었다. 대장간을 차린 ‘화성공장’의 이근세, 터줏대감 노릇을 해야 했던 이윤엽, 조각가 천성명과 임승천, 붓을 놓지 않고 싶었던 최춘일을 비롯해 여러 작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대장간의 화로와 이윤엽의 백열등, 최춘일의 따듯한 방은 목리를 생성과 창조의 공간으로 바꾸는 구들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윤기는 그들보다 조금 늦은 2004년 봄에 입주했다. 그는 콘테이너와 하우스 작업실 아래쪽에 있는 빈집 한 채를 발견했는데, 귀곡산장으로 보일만큼 음습한 이 집이 그는 마음에 들었다. 깔끔한 성격이 빛을 발한 것은 이 ‘아랫집’의 변신에 있었다. 화가의 손과 숨결은 오래도록 사람의 온기를 품지 못했던 이 집을 곧 생기가 도는 집으로 바꾸어 놓았다. 집은 사람이 깃들어야 한다. 사람이 깃들지 않은 집은 빈집이 아니라 폐허이다. 목리창작촌은 이 아랫집의 활기복원과 더불어 완성되었다. 그리고 6년간 목리는 가장 뜨거운 세월을 보냈다. 작가들은 개인전을 위해 단체전을 위해, 그리고 초대전을 위해 작품을 실어 날랐고 사람들이 북적였다. 전시가 끝난 뒤에도 이들은 목리 아궁이의 불을 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제2차 동탄 신도시 개발 소식이 날아들었다. 2차 예정지에 목리가 포함된 것이다.


목리는 시장이라는 현실계와 창조라는 초현실계 사이에 존재하는 ‘청산’이었다. 그래서 철저히 삶을 기반으로 하되, 다래와 머래를 먹지 않으면 창조할 수 없는 작가들의 정신구조와 몸은 이 목리에서 달구질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목리가 붕괴되는 것은 동탄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에 불과하지만, 이것은 전 국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4대강 살리기’나 아파트 지상주의의 결과들과 다를 바 없다. 이문구의 『우리동네』연작이 탄생한 화성시 발안의 그 동네가 흔적하나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듯이 숱한 예술의 둥지들이 파괴되고 사라질 것이다. 삶의 기억이나 예술가의 둥지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들의 인식 속에는 천박한 자본욕망과 허영의 도시국가만이 최고의 선이자 도덕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온톤 개발과 독재로 점철되었던 우리 근대화에 대한 절망적 계승이지 결코 에코토피아로 향한 녹색의 세상이 아니다. 심지어 MB정권은 오독의 극치로 ‘녹색성장’을 밀어 붙이며 온 땅을 파헤치고 있지 아니한가! 이 얼마나 억장 무너지는 현실이란 말인가!

 

시인 우대식은 “근대화를 거치는 동안 상실한 정신풍경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물음을 던져”준다고 성찰하면서 경기 고양 출신의 월북시인 박세영을 떠올린 바 있다.

 

산 없는 이곳에서 물 흐린 이 땅에서 흘러다니는

나그네 몸이 외롭구나.

지금은 추석달, 끝없는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저 달,

북만의 들개 짖는 소리에 마음만 소란쿠나.

고향의 하늘을 나는 새, 땅에 기는 짐승들도,

지금은 따스한 제 집에서 단꿈을 꾸련만,

팔려간 노예와 같이

풍겨난 새와 같이 이 몸은 서럽구나.

- 박세영의 시 「행수」 부분

 

박세영의 고향인 고양은 이미 신도시 밑창에 깔려버린지 오래다. 안양천변의 고단한 삶을 유려한 필체로 그려낸 기형도 시들도 떠올릴 수 있으리라. 시흥에서 안양으로 가는 중간 기아대교를 건너 좌회전을 하면 그의 생가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생가로 가는 길은 아직 천변으로 낮은 판자집들이 줄을 지어있고 그 가운데는 작은 교회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모습은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1번국도 그 산업도로 한 켠에서 산업의 발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들의 생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우대식, 「1번국도의 문화적 실크로드를 따라서」 중에서)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 기형도 시「안개」 부분

 

이윤기의 이번 회화들은 박세영과 기형도의 시를 닮았다. 그가 그린 풍경들은 목리에서 채집한 것들이며, 또한 떠남의 채비를 준비하면서 새긴 ‘목리연가’이기 때문이다. 총 11점의 작품 중 8점이 목리의 풍경인데, “팔려간 노예와 같이 풍겨난 새와 같이” 이 풍경들은 서럽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파란 감나무와 지붕을 타고 다니던 고양이들, 하얀 배꽃과 버드나무 밑 흑염소 가족, 덩치가 컸던 부엉이와 논두렁 밭두렁의 오리들, 그 풍경들은 이제 신도시에 팔려갈 것이고 풍겨(흩어진다는 뜻)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회화는 아직 명징하게 남아있는 목리의 ‘지금’을 천천히, 느린 풍경의 거울로 복사하여 우리들 기억의 심장으로 타전하고 있다.

평론6_채취_아크릴 볼록 반사경에 오일칼라, 지름 100cm.jpg

이윤기의 작품은 도로반사경에 비친 풍경들이다. 도로반사경은 “도로의 굴곡부와 보기 어려운 교차로 따위에 다른 방향에서 오는 차량을 확인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거울”인데, 일반적으로 원형의 볼록 거울을 사용한다. 그가 이 작업을 처음 시도한 것은 <채취>(2007)였다. 이 작품은 실제 반사경에 작가 자신을 그린 후 전시장에 혹은 외부에 설치하는 방식이었다. 인물만 그렸기 때문에 여백으로 남은 거울은 자연히 작품이 설치된 풍경으로 채워졌다. 이후 작업한 <거울이 있는 방>(2008)은 볼록 반사경에 비친 방의 풍경을 회화로 재현한 것이다. 평면과 달리 볼록 반사경은 사방의 풍경을 더 많이 끌어안는 특징이 있는데, 이 작품은 그런 반사경에 비친 ‘아랫집’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런데 올해 제작한 작품들은 반사경의 둥근 원을 취했을 뿐 비틀어진 볼록 세상이 아니다. 오히려 ‘보기 어려운 교차로에 다른 방향에서 오는 차량을 확인하기 위해’ 설치해야 하는 반사경의 존재성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그동안 늘 목리에서 보아 왔지만 보기 어려웠던 풍경들일 수 있으며, 다른 방향에서 밀려오는 불길한 풍경의 그림자일 수도 있단 얘기다. <흐르는 풍경-구름솟대>는 그런 풍경이 집약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목리를 기억하는 이들은 이 작품 속 풍경이 몇 개의 장면을 오버랩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아랫집 지붕위에 올라간 작가는 얼마 전에 죽은 ‘개투’를 안고 있다. 회색의 하늘과 흩날리는 구름은 이제 곧 들이닥칠 철거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과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저 하늘은 6년의 세월을 버텨 온 그의 삶이 투영된 현장이라 할 수 있으며, 근대화 이후 형성된 이 작은 마을의 지붕이기도 할 터이다. 그리고 지붕 뒤로 이제는 안성으로 이주해 버린 이윤엽 작가의 솟대들이 서 있다. 낡은 삽으로 만든 솟대, 악어를 닮은 물고기 솟대, 오리 솟대 등을 비롯해 투박하고 엉성하게 깎아서 만든 솟대들이. 그러나 어느 솟대도 북쪽을 바라고 있지 않다. 저 솟대들은 방향타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둥지를 상실한 새들처럼 밑도 끝도 없이 떠돌아야 하는 목리의 현실인 것이다.

117 흐르는 풍경(구름 솟대), 캔버스에 유채, 원지름58_두께1.2c
철새시리즈1(아랫집).jpg

목리 아랫집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아랫집>에 새겨져 있다. 눈부시게 푸른 날, 시간이 정지한 듯한 이 풍경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윤기라는 작가의 시선이 얼마나 사려 깊은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세밀한 터치로 그려 놓은 아랫집은 늙은 농부의 주름진 얼굴을 닮았다. 그가 그 만큼 늙은 시간을 품고 누웠는데, 이마 위로 오리 몇 마리가 걸어간다. 옆 집 고양이 한 놈이 그 뒤를 걷고 있다. 쫓고 쫓는 형국이 아니다. 저 놈들은 분명 그의 이마를 타면서 세월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저 멀리 백로 한 쌍이 날아가고, 그는 누워서 그렇게 흘러가는 새들과 구름을 본다. 그의 눈 속에 작가 자신이 있다. 그리지 않아도 저절로 채워질 이젤이 서 있다. 아랫집이 그이고 그가 작가인 일여(一如)의 세계!

 

그런데 그 세계는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아랫집>의 대칭공간이 저 <노동당사>임을 깨닫는다. 모순에 찬 현실은 일여의 세계를 향한 우리의 꿈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아랫집’은 폐허의 공간으로 구천을 떠도는 ‘노동당사’를 닮아갈 것이다. 뼈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붕괴될 것이지만 구천으로 간 ‘아랫집’은 아무도 깃들지 않을 테니까. <노동당사>는 강원도 철원이 고향이지만 이 작품 속 ‘노동당사’는 현실이 아니다. 검은 안개 위로 보이는 ‘노동당사’는 이데올로기 근대화의 모뉴멘트이자 20세기 한반도의 어두운 페르소나(Persona)일 뿐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처럼 이 세계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영속하며 현실과 비현실, 초현실의 경계를 넘는다. 이승을 날던 새들이 노동당사위를 유유히 날아가는 저 풍광을 보라! 그러나 새들만이 경계를 넘는 것은 아니다. ‘아랫집’에 있던 ‘그’가 어느 새 당사 안으로 들어가 손을 내밀고 있다.

16.DMZ (노동당사).jpg

낡은 이데올로기의 현실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그 따위 이데올로기를 조장하는 세력과 권력이 만들어 내는 현실은 파괴의 현실이며 그래서 분노의 현실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그런 세력들이 불도저를 앞세워 밀어 붙이는 학살의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 강과 산하, 온 대지에 대한 참혹한 학살을 막아야 한다. 공동체적 삶과 현실에 밀착된 참된 이데올로기의 깃발을 높이 세워야 한다. 그것은 개발의 논리가 아니다. 명품도시, 세계 일류도시를 지향하지도 않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꿈꾸지도 않는다. 인간의 현실은 ‘평화’여야 한다. 모두가 둘러앉아 따듯한 밥을 먹는 그것, 평화. 그 세계를 위해 지극히 현실적인 공동체 이데올로기를 되살려야 한다. 이윤기의 푸른 회화는 바로 그것들의 심장이다! 푸른 눈 부릅뜨고 새벽에서 황혼까지 버티는 부엉이의 심장이다!

​김종길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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